[日本經濟新聞] 戰後 60年, 經濟(上)

Date 12/20/2005   Hits 1854

戰後 60年, 經濟(上)
<上昇의 1945년-1990년>
戰後 부흥으로부터 경제대국이 되기까지의 <상승>의 일본을 지탱한 것은 후에 <日本型>이라고 불리워지는 경제시스템 이다. 이는 <官과 民>,<銀行과 企業>,<會社와 社員>으로 크게 나누어 3개의 특이한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官과 民>의 관계에서는 官主導,관료 통제에 의한 <업계진흥.보호정책>이다. 終戰 직후는 GHQ(General Headquarters/連合&#22269;最高司令官&#32207;司令部;1945年 미국 정부가 설치한 일본 점령정책의 실시기관으로 52년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폐지) 지령에 의한 재벌 해체와 독점 금지법 성립 등 경쟁 촉진 정책도 취했지만, 결국 뿌리 내리지 못하고 官主導로 자금을 석탄과 철강 등 중요한 분야에 쏟는 <집중 생산방식>으로 부흥이 진행 되었다.
이 결과, 일본은 국내 수요 보다도 해외 수요에 크게 의존하는 수출 주도형 경제를 구축 했다. 동시에, 舊 通産省의 행정 지도에 의한 산업 정책, 舊 大藏省의 護送船團 행정에 의한 금융 시스템 등 각각의 관공서와 업계와 그리고 族議員(관련업계의 이익보호를 위하여 관련정부기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는 국회 의원)이 <政.官.財의 트라이앵글>이라고도 불리 우는 강한 협조 시스템을 쌓아 올렸다.
<銀行과 企業>은 메인 뱅크(주거래 은행) 제도, 상호 주식 보유를 통한 밀접한 공생 공영의 관계를 구축 했다. 메인 뱅크는 거래처 기업이 곤경에 빠졌을 때는 채권 포기 등 금융지원으로 시간을 주었다. 증권시장 등 직접 금융이 未發達 했던 戰後 일본에서는 기업에 있어서 은행이 사실상 유일의 자금 공급자가 되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 했다.
<會社와 社員>도 年功賃金,終身雇用으로 장기 안정적인 것이 되었다. 고용의 유동성은 한정 되어, 회사는 사원에 극진한 복리 후생을 제공 하고 가족처럼 취급하여 안정적인 임금 인상을 약속 했다.
이러한 일본형 시스템의 원형은 戰時중의 총동원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1940년대 체제>라고의 견해도 있지만, 결국은 戰後 일본의 성장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틀림 없다.
일본 경제는 戰後의 혼란기로부터 1950년에 시작한 朝鮮戰爭(6.25 전쟁)의 特需로 부흥에 탄력을 받아,그 후는 40년 불황 등 몇 번인가 불황이 있었지만 평균해 보면 1970년대까지는 7-10%대의 고도 성장을 기록했다.
1971년의 닉슨 쇼크로 1달러=360엔 이라고 하는 고정 환율의 브레톤윗즈 체제가 붕괴하고 엔高 시대를 맞았다. 1970년대에는 2번의 석유 위기에 직면해 고도 성장기로부터 안정 성장기에 들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일본은 에너지 절약, 합리화로 위기를 신속히 극복하고 1980년대 후반까지는 엔高도 있어 달러 환산의 1인당 GDP(국민 총생산)는 미국을 누르고 세계 1위기 되었다.
85년의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엔高가 더욱 진행 되었다. 금융 완화와 공공 사업의 확대 등의 경기 자극책으로 잉여 자금이 주식,토지 등 자산 가격을 밀어 올려 未曾有의 버블 경제에 돌입 했다.
많은 識者는 플라자 합의로부터 버블에 들어간 시점으로 戰後 경제를 지탱한 <官과 民>,<銀行과 企業>,<會社와 社員>의 관계는 변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戰後의 불탄 황무지로부터 경제 대국이 된 <成功 體驗>이 급격한 변화를 어렵게 했다.
관료는 일단 쌓아 올린 官主導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스스로의 권한 축소로 이어지는 규제 완화에 저항 하였다. 은행도 기업과의 종래의 관계를 위험하게 하는 금리와 금융 업무의 급속한 자유화에 반대 했다.
大藏省 증권국에서 昭和 40년의 증권 불황을 경험한 前 증권국장인 坂野常和氏는 <당시 좀더 직접 금융을 중시한 개혁을 진행 했어야 했다. 역부족 였다>라고 회고한다.
일본 전체가 지금의 경제 시스템이 영속 한다 라고 너무 믿었던 것이 버블로 이어졌다. 특히 토지 본위제 라고도 말할 수 있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은행 융자는 상승의 <土地 神話>가 형성 됨에 따라 버블을 크게 팽창 시키는 엔진이 되었다.

<下落의 1991년-2005년>
버블 붕괴는 폭력적인 형태로 <官과 民>,<銀行과 企業>,<會社와 社員> 3개의 관계의 재검토를 강요 했다.
상승기 경제 성장의 終焉이 명확히 되어 확대하는 파이를 강자로부터 약자까지 모두 분배하는 政.官.財의 구조는 삐걱 거렸다. 버블 붕괴와 동시에 일어난 冷戰의 종언.글로벌化의 진전도 일본 국내만의 분배를 어렵게 했다.
버블 붕괴 직후 일본은 舊來形 시스템을 풀 가동 해서 곤경을 탈피하려고 했다.금융계에서는 大藏省 銀行局을 중심으로 한 護送船團을 계속하여 약한 금융 기관을 돕기 위해 奉加帳 方式 (경영위기에 빠진 은행 등을 구제하기 위하여 민간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으로, 버블 경제붕괴 후의 은행 위기때에 大&#34101;省의 지도 하에 행해 졌다. 후에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라고 하는 업계에서의 지원책을 취했다. 주택 금융 전문회사에의 금융 지원 등에서도 종래형의 시간 벌기형의 문제 처리를 계속 했다.
景氣 대책도 공공 사업으로 건설업을 통해서 재정 자금을 뿌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취했지만, 상처를 이것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 했다.
버블 붕괴로부터 5년 이상 지난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종래형의 틀 그대로는 재구축 할 수 없는 것이 서서히 확실히 해져 갔다.
1997년 가을에는 北海道 拓殖은행, 山一증권 등 대형의 금융 파탄이 속출, 護送船團 方式은 이제 기능하지 않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명확해 졌다. 1998년에는 금융 기관에 의한 舊 大藏省.日銀 직원 접대 의혹이 확산 되어 오랫동안의 <官과 民>의 서로 의지하는 구조가 계속 이어져 왔던 금융 행정도 큰 기로에 섰다.
은행과 기업의 관계도 흔들렸다. 주가 하락으로 보유 주식에 거액의 評價損이 발생한 은행은 바로 기업과의 상호 주식 보유를 재검토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舊 大藏省으로부터 분리한 金融廳은 은행의 불량 채권을 종래 이상으로 엄격하게 査定. 문제의 시간 벌기형의 기업 지원은 허용 되지 않게 되었다.
재확인은 2002년 가을에 공표한 금융 재생 플랜 이다. 금융청은 대형은행에 불량 채권 처리를 재촉하고 과잉 채무 기업의 정리를 추진 했다. 산업 재생 기구의 齊藤 社長은 <이 시기에 은행은 간접 금융 중심의 일본 금융이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을 완전히 인식 했다>라고 지적 하고 있다.
<회사와 사원>의 관계도 변했다. 正社員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해서 年功賃金 下의 종신 고용하는 방식으로부터 필요에 상응한 파트타임,파견 사원,아르바이트 등 非正規 社員을 사용하는 기업이 증가 했다.
2005년. 대형은행은 불량채권 처리에 일단 해결의 전망이 보인다. 페이오프(Pay Off/ 금융기관이 도산한 경우 예금보험기구가 예금자에 예금액의 일정액을 한도로 보험금을 지불하는 것)도 解禁 하고 금융 정상화에 발을 내디뎌 일본 경제도 완만하지만 회복 기조를 유지 하고 있다.
하지만 종래의 일본형에서 변한 새로운 시스템 만들기는 여전히 모색 중이다. 중앙 관청의 관료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업계에의 영향력은 아직 크다. 많은 중소 기업은 더욱 은행 융자에 의존 하고 있다. 버블 붕괴로부터 약15년 동안 일본 경제는 겨우 재생의 발판(실마리)을 얻었지만, 21세기도 지속 가능한 새로운 <國家의 形態>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戰後 60년,經濟(下)가 계속 이어 집니다)